
애플은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자체 설계한다. AP는 별도의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 이미지 프로세서 등 다양한 기능을 하나의 칩에 담고 있다. 이는 다양한 연산, 처리, 제어를 수행하기 때문에 스마트폰에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두뇌’ 역할을 한다고 평가받는다.
그동안 애플 아이폰은 같은 라인업 내 어떤 모델을 사든, 동일한 성능을 얻을 수 있었다. 모두 같은 프로세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폰 14부터는 이 공식이 깨져버렸다. 애플은 아이폰 14부터 일반 모델과 프로 모델의 급 나누기를 시작했다. 지난해 아이폰 13은 일반 모델부터 프로맥스까지, 모두 같은 ‘A15 바이오닉 칩’이 탑재됐다. 아이폰 14·아이폰 14 플러스에도 동일한 A15 칩이 탑재됐다. 반면 아이폰 14 프로·아이폰 14 프로맥스에는 회사의 최신식 프로세서인 ‘A16 바이오닉 칩’이 탑재됐다.
아이폰 14 프로 제품에만 탑재된 최신 칩…뭐가 더 좋아졌나

애플의 최신 프로세서 차별화 전략이 통했던 건지, 아이폰 14 프로 모델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요를 보인다. 하지만 다양한 벤치마크 테스트가 증명하듯, 사실 아이폰 14 일반 모델과 프로 모델의 가시적인 성능 차이는 없다. 작업 속도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폰 14 프로 제품의 A16 칩은 더 나은 배터리 수명과 고급 카메라 기능을 제공한다.
아이폰 14 프로 모델은 특히 그래픽 성능에 신경을 쓴 모습이다. 폰 아레나가 인용한 중국 스마트폰 벤치마크앱 ‘안투투(Antutu)’ 결과에 따르면 A16 칩의 GPU 성능은 전작 대비 28% 향상됐다. 이는 최근 몇 년간 아이폰에서 나타난 가장 큰 폭의 GPU 성능 향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CPU와 GPU간 대역폭도 50% 증가해 두 장치 간의 흐를 수 있는 데이터양이 많아졌다. 따라서 전보다 그래픽 성능이 개선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혁신에 혁신을 더한 애플 치고는 새로운 프로세서가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최근에는 이러한 평가가 사실은 애플의 칩 설계 역사상 유례 없는 실수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쩌면 아이폰 14 프로 제품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성능을 자랑했을 수도 있단다. 회사의 계획은 원래 이 정도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레이 트레이싱 지원하는 게 목표였는데…후반 설계 결함 발견으로 무산돼

23일(현지 시간) 디 인포메이션(The Information)은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애플 A16 칩은 원래 ‘레이 트레이싱(Ray Tracing)’ 기술을 지원할 예정이었다고 보도했다. 레이 트레이싱은 빛이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반사되는지를 계산해 광원의 위치를 역추적하는 기술이다. 복잡한 연산이 필요한 기술이지만, 그만큼 사실적인 그래픽을 구현하는 핵심 기술로 꼽힌다.
애플은 소프트웨어 시뮬레이션을 통해 해당 기술을 새로운 칩에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프로토타입을 제작해 하드웨어 테스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테스트 결과 레이 트레이싱을 지원하는 프로토타입이 더 많은 전력을 소모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배터리 수명이 단축되고 기기 과열 문제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애플이 이런 설계 결함을 너무 늦게 발견한 데서 발생했다. 문제를 수정할 시간이 충분히 없었던 애플은 결국 레이 트레이싱 기술 탑재를 포기해야 했다.
차기작에 레이 트레이싱 탑재될까…완전하지 않았지만 혁신 시도했던 것에 의의 있어

결국 A16 칩 개발 후반부에 결함을 발견하면서 애플은 전작에서 사용된 그래픽 기술을 기반으로 칩 성능을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역시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지만, 시장에 기대치가 워낙 높은 만큼 아쉬움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디 인포메이션에 내부 소식통은 개발 과정에서 뒤늦게 발견한 결함에 대해 “애플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회사 역시 아쉬움을 통감하는 듯, 지난 9월 제품 공개 당시 A16 칩에 대해 과장된 설명보다는 그저 GPU 메모리 대역폭이 50% 증가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애플이 계획대로 칩 설계에 성공했다면, 어쩌면 아이폰 14 프로가 지금보다 더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가 이미 레이 트레이싱 기술을 자체 설계 칩에 탑재하는 시도를 한 만큼, 차세대 칩에 해당 기술을 탑재할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있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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