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말, 엔비디아(NVIDIA)가 2년 만에 새로운 플래그십 ‘지포스(Geforce) RTX 40시리즈’를 공개했다. 새로운 그래픽 아키텍처인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를 기반으로 만든 지포스 RTX 4090과 RTX 4080은 기대만큼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놀란 건 성능보다 가격이었다. 신제품 가격은 전작보다 더 사악해졌다. 지포스 RTX 4090은 1599달러(약 228만원)에, 그나마 저렴하다는 RTX 4080도 1199달러(약 171만원)에 출시됐다. 안 그래도 비쌌는데, 더 비싸졌다. 지포스 RTX 4090의 가격은 전작보다 100달러, RTX 4080는 200달러 올랐다. 한눈에 봐도 상당한 상승 폭이다.
엔비디아가 가격을 올리니, 경쟁사인 AMD도 가격을 올리지 않겠냐는 추측이 이어졌다. 본래 AMD는 엔비디아의 제품 가격을 기준으로 그보다 저렴하게 내놨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GPU 시세가 오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AMD는 전작과 유사한 가격을 책정해 신제품을 내놨다. 지난 3일(현지 시간) AMD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출시 행사에서 라데온(Radeon) RX 7900 XTX와 RX 7900 XT를 공식 발표했다. 회사는 이 자리에서 제품의 가격과 사양, 그리고 출시 날짜를 공개했다.
‘그대로 유지된 합리적인 가격’…최초의 칩렛 구조 GPU인 RX 7000시리즈
AMD의 새로운 GPU는 오는 12월 13일 판매를 개시한다. 최상위 모델인 라데온 RX 7900 XTX는 999달러(약 142만원)로 소매 시장에 출시될 예정이다. 이는 라데온 RX 6000시리즈 중 RX 6900 XT와 동일한 가격이다. RX 7900 XT는 이보다 조금 더 저렴한 899달러(약 129만원)에 판매될 예정이다. GPU 가격 고공행진 속에, 경쟁사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을 유지했다.
신제품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GPU 최초로 ‘칩렛(Chiplet)’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최근 반도체 공정 미세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제조 비용도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 회사 입장에선 최신 미세 공정 칩을 위해 무작정 많은 비용을 감수하기 어렵다. 칩렛은 바로 상승하는 제조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되는 반도체 패키징 기술이다. 반도체 칩에 담아야 할 기능을 수행하는 작은 칩을 먼저 만들고, 이를 수평으로 이어 붙이는 것이다. 이때, 기능별로 쪼갠 칩의 최소 단위가 칩렛이다. 이렇게 하면 최신 미세 공정 없이도 코어 수를 늘릴 수 있어, 가격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해당 기술은 본래 회사가 중앙처리장치(CPU) 생산에 주로 적용했던 기술이다. 이제 AMD는 칩렛 기술을 GPU에도 적용했다. 하지만 CPU 제품에 적용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동안 AMD는 CPU 제품에서 코어를 늘리기 위한 여러 개의 다이(Die)와 기타 기능용 하나의 추가 다이를 사용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GPU 연산을 담당하는 코어가 담긴 하나의 큰 다이와 각 기능별 여러 개의 다이를 조합했다.
AMD는 실질적인 GPU 연산과 처리를 담당하는 ‘그래픽 컴퓨팅 다이(GCD)’라는 작은 칩 다이에 디스플레이 엔진, 셰이더, 미디어 엔진 등을 넣고 있다. GCD는 TSMC의 5나노 공정을 이용한다. 이외에 최대 96MB까지 내장 가능한 캐시 메모리와 GDDR6 메모리 컨트롤러로 구성된 ‘메모리 캐시 다이(MCD)’는 TSMC 6나노 공정을 이용한다. 리사 수(Lisa Su) AMD 최고경영자(CEO)는 칩렛 구조 설계덕에 수율을 높이면서도, 전력 소모를 최소화해 최대 성능을 끌어낼 것이라며 자신했다. 눈길을 끈 것은 회사가 프레젠테이션 발표에서 경쟁사인 엔비디아 제품과 비교하지 않고 전작과의 비교를 통해 성능 향상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약점인 레이트레이싱도 보완했다’…AMD 차세대 GPU 성능은
최상위 모델 라데온 RX 7900 XTX와 RX 7900 XT 모두 새로운 아키텍처인 RDNA 3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AMD의 야심작이다. 개선된 아키텍처 덕에 회사는 전작보다 54% 향상된 성능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라데온 RX 7900 XTX는 전체 24GB(기가 바이트) RAM으로 제공되고, RX 7900 XT는 20GB로 제공된다. RX 7900 XTX는 최대 2.3GHz(기가 헤르츠)에서 실행되는 96개의 컴퓨팅 장치(CU)가 있다. 이때 전력 소비는 355W라고 한다.
이보다 저렴한 모델인 RX 7900 XT는 클럭 속도 2.0GHz와 84개의 CU, 전력 소비 300W의 사양을 갖고 있다. 두 제품보다 전작보다 더 큰 팬(Fan)과 매끄러운 방열판이 있지만, 성능 면에서는 전작과 유사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AMD의 신제품은 작업 속도가 빨라졌지만, 전력 소모는 최소화한 효율적인 방향으로 설계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회사는 레이 트레이싱(Ray Tracing) 성능이 가장 큰 약점으로 뽑혔다. 레이 트레이싱은 빛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반사되는지 계산해 광원의 위치를 역추적하는 기술이다. 현실적인 그래픽을 위한 필수 요소로 꼽힌다. 해당 기술은 엔비디아가 가장 먼저 도입한 기술이다. 그래서 엔비디아엔 강점이지만, AMD엔 상대적으로 약점인 부분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약점도 보완했다. AMD에 따르면 회사는 새로운 GPU에 차세대 가속기를 탑재했다. 해당 가속기 덕에 컴퓨팅 단위당 50% 더 높은 성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회사가 몇 가지 게임을 실행해 테스트해 본 결과, 최상위 모델 라데온 RX 7900 XTX는 RX 6950 XT에서 같은 게임을 실행할 때보다 약 1.5~1.7배 빨랐다고 한다. RX 7900 XT와의 비교는 직접적으로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IT 매체 디지털트렌드(digitaltrends)는 만약 회사가 직접 비교를 진행했다면, 전작보다 약 1.3~1.5배 빨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AMD가 엔비디아의 제품과 직접 비교하지 않아 경쟁사 대비 어느 정도의 성능을 뽐낼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내달 소매 시장 출시 후, 제품이 소비자 손에 들어갔을 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엔비디아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제품이 소비자 앞으로 찾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이수현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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