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 (23)’기라도라’ 이건 해방의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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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는 해방의 가전이다. 어떤 가전이든 인간에게 풍요와 편리를 가져다준 건 변치 않다. 하지만 세탁기는 좀 더 특별하게 와닿는다. 인간이, 특히 여성이 노동의 지옥에서 허우적거릴 때 손을 내밀어 줬기 때문이다.

현대적 세탁기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0년대 제임스 킹과 해밀튼 스미스가 각각 드럼 세탁기와 회전식 세탁기를 발명했다. 최초의 가정용 세탁기는 윌리엄 블랙스톤의 세탁기로 본다. 1874년 그는 아내 생일 선물로 세탁기를 직접 만들었다. 아내의 반응이 좋자 그는 바로 세탁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블랙스톤의 아내처럼 수많은 여성이 세탁이라는 노동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세탁기는 전자동이다. 전력 공급으로 사람이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 세탁뿐만 아니라 건조까지 가능하다. 일련의 과정은 2시간 안팎이다. 그 시간 또한 다른 일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세탁 노동은 어느새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고 건조기에서 꺼내는 과정으로 압축됐다.

그러나 모든 가정에 전자동 세탁기와 의류 건조기가 있는 건 아니다. 기능이 고도화할수록 가격도 비싸졌다.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고성능 세탁기를 확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세탁은 노동이다. 빈부격차는 노동 시간도 차별하고 있다.

적정 기술은 환경과 타협해야 한다. 현지 사정을 고려해 가장 적절한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트 디자인대학에서 공부하던 알렉스 카부녹과 유지아도 이러한 타협점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기라도라(GiraDora)’다. 개발도상국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가격을 낮추고 전기 공급이 없어도 가동할 수 있는 적정 기술 세탁기다.

알렉스 카부녹과 유지아는 페루를 방문한 적 있다. ‘세이프 아구아 페루 프로젝트’에 참여한 그들은 쎄로 베르데 지역 주민의 환경을 개선할 제품을 개발하고자 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하루 4~10달러정도만 벌 수 있었다. 대표적인 빈곤 지역이다.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건 우물 근처에서 빨래를 하는 여성들이었다. 쎄로 베르데 여성들은 손 빨래로 세탁했다. 빨래 시간이 5~6시간에 달했다. 가정 노동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이 빨래에 손이 묶였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빨랫감도 산더미다. 알렉스 카부녹과 유지아는 여성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겠다고 다짐했고, 기라도라를 디자인했다.

기라도라는 스페인어로 풀면 ‘탈수하는 세탁 기계’다. 탈수(girar)와 세탁기(lavadora)의 합성어다. 이름처럼 세탁과 탈수가 모두 가능하다. 겉으로 보면 페달이 달린 플라스틱 드럼통처럼 보인다.

기라도라 안에는 플라스틱 재질의 통(Tub)이 있다. 그물망처럼 물이 잘 빠져나오도록 했다. 이 안에 빨랫감을 담는다. 이 그물망 통은 커다란 물통으로 감싸져있다. 통은 가운데 축으로 고정해 아래 회전판과 연결되도록 했다. 페달을 밟으면 안에 있는 그물망 통이 회전한다. 뚜껑을 덮고 그 위에는 푹신한 쿠션을 올려놓는다.

빨랫감과 물, 세제를 기라도라 안에 넣는다. 회전하면서 빨랫감이 뒤 섞이고 그 힘으로 때를 뺀다. 자동 세탁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전기 대신 사람의 힘(발)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때가 빠지면 같은 방식으로 빨랫감을 헹군다. 빨래가 끝나면 다시 페달을 밟아 통을 회전시킨다. 탈수 작업이다. 물은 하단의 마개를 열면 자연스럽게 빠진다.

알렉스 카부녹과 유지아는 시제품을 만들어 페루에서 테스트했다. 사람마다 어느 정도 속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빠르면 한 통에 30분 안팎으로 세탁 시간을 줄였다. 기존 일주일에 3~5번 정도 5~6시간씩 세탁한 것과 견줘 비약적으로 노동 시간을 감축했다.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는 지역에서는 물도 아낄 수 있다. 기라도라는 손세탁할 때보다 물 사용량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여성의 건강을 지키는데 일조할 수 있다. 손세탁 시 대부분 쪼그리고 앉아서 허리를 굽혀 작업한다. 척추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다. 손으로 직접 힘을 가해 빨래하기 때문에 근육통 피할 수 없다. 손목 건초염도 우려된다. 기라도라는 앉아서 페달을 밟는 형태기 때문에 허리를 펼 수 있다. 팔보다 큰 힘을 쉽게 줄 수 있는 다리를 이용해 노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손 빨래보다 건조 시간을 단축한 것도 돋보인다. 손 빨래 경우 탈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빨랫감은 마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습한 날에는 1주일이 넘도록 마르지 않을 때도 있다. 이 경우 빨랫감에 곰팡이가 피기 쉽다. 질병의 원인이다. 기라도라의 탈수 기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기라도라 개발 시 책정된 가격은 약 40달러 안팎이다. 수입이 부족한 빈곤 지역 주민을 위해 가격을 낮춰 접근성을 높였다. 무엇보다 전기 없이 사용할 수 있어 유지비가 적게 든다. 시제품 테스트 후 개선해야 할 부분을 보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확산은 안됐지만, 현지 상황을 적극 고려한 ‘착한’ 아이디어로 평가된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권동준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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