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Unsplash / zhiyue)
애플은 독자 노선을 선호한다. 모바일 기기 핵심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만 봐도 그렇다. 안드로이드 제품군이 퀄컴 스냅드래곤, 미디어텍 디멘시티, 삼성전자 엑시노스 등 여러 AP를 탑재하는 것과 달리, 애플은 자체 개발한 A 시리즈 칩을 사용한다. 태블릿·PC도 마찬가지다. 아이패드와 맥북, 아이맥에는 A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M 시리즈가 사용된다.
이는 비단 하드웨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애플 제품은 운영체제(OS)부터 독특하다. 아이폰은 iOS, 태블릿은 아이패드OS, PC 제품군은 맥OS를 탑재한다. 모두 애플 제품에만 사용되는 운영체제다. 기능을 살펴봐도, 애플 기기에만 특화된 것들이 많다. 아이메시지, 페이스타임, 에어드롭과 같이 사용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능 모두 애플 기기 전용이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애플 생태계에 발을 들이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 타사 기기와 호환성은 매번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반면, 애플 기기 간 호환성은 굉장히 뛰어나서다. 애플은 이를 노렸다. 사용자들이 애플 생태계에 묶여, 충성 고객으로 안착하는 이른바 ‘락 인(Lock in)’ 전략을 구사했다. 애플의 독자 노선이 성장의 원동력으로 꼽히는 이유다.

(출처:Unsplash / zhiyue)
이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다. 애플의 전략은 배타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애플은 자체 생태계에 제삼자가 개입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스스로 구축한 생태계가 자신의 의지대로만 순환하길 바란다. 그 과정에서 사용자들은 애플의 몽니로 인해 원치 않는 불편함을 감수한다. 애플의 생태계가 꼭 필요한 일부 업체들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애플은 이러한 비판에도 나날이 성장했기에,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고 있다. 올해 애플에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유럽연합(EU)에서 방아쇠를 당긴, 충전단자 통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는 올해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등 모바일 기기 충전단자를 USB-C로 통일하는 법안을 채택했다.
유럽연합이 내세운 명분은 전자폐기물 감축과 사용자 이익 증진이다. 모바일 기기 충전단자를 하나로 통일하면 유럽 내 전자폐기물을 1만1000톤 감축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또 규격이 하나면 케이블을 여러 개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져, 사용자들이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유럽연합의 판단이다.

(출처:Unsplash / christian lue)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안드로이드 기기 사용자들은 USB-C 케이블 하나로 충전을 해결한다. 불편을 겪는 쪽은 애플 기기 사용자들이다. 애플 기기는 충전단자가 중구난방이다. 애플은 맥북과 아이패드 일부 제품에 USB-C 단자를 넣고, 아이폰이나 다른 액세서리에는 라이트닝 단자를 탑재한다. 그래서 애플 사용자들은 기기에 맞는 별도 케이블이 필요하다.
사실상 유럽연합 법안은 애플을 겨냥한 셈이다. 요즘 모바일 기기는 대부분 USB-C 단자를 탑재한다. 이와 달리 애플은 지난 2012년 개발한 독자 규격인 라이트닝을 함께 사용한다. 10년간 애플 제품에만 사용 가능한 규격을 고수해온 것. 애플은 라이트닝 소개 당시 “향후 10년을 위한 최신 커넥터‘라고 했다. 이제 그 10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유럽연합은 오는 2024년 12월부터 이 법안을 시행할 예정이다. 이 시기에 맞춰 인도, 브라질 등 여러 국가에서 유사한 법안을 통과시켰거나, 마련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도에서는 웨어러블 기기 충전 방식을 통일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인도가 이를 구체화한다면, 충전 호환성이 떨어지는 애플워치도 피해 갈 수 없다.

(출처:Apple)
애플은 지난 2008년 자사 앱마켓 앱스토어를 개설한 뒤, 수수료(15~30%) 명목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동시에 타사 앱마켓 진출을 철저히 막았다. 그래서 애플 사용자들의 선택지는 앱스토어 단 하나였다. 애플의 앱스토어 고집도 조만간 꺾일 듯하다. 유럽연합 디지털시장법(DMA)로 인해 애플이 사이드로딩(Sideloading)을 허용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이드로딩이란 자체 앱마켓 외 앱을 내려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의미한다. 유럽연합은 애플과 같은 거대 기업을 게이트키퍼(GateKeeper)로 지정하고, 사이드로딩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를 어기면 전 세계 매출의 10%를 벌금으로 부과한다. 즉 유럽연합은 애플이 걸어잠근 앱마켓 분야를 개방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막대한 벌금을 매기기로 한 것이다.
유럽연합 디지털시장법은 2024년 3월부터 시행된다. 애플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2년 남짓이다. 애플은 2024년이 오기 전까지 충전단자를 USB-C로 통일하고, 서드파티 앱마켓과 같은 앱스토어 대체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유럽연합의 선제적 조치로 인해, 애플 사용자들마저 혀를 내두르던 몇몇 애플의 아집을 꺾게됐다.

(출처:Apple)
국제 정세는 애플의 또다른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확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 심화 등 여러 요소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봉쇄로 제품 생산에 차질이 발생했고,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다. 미중 패권다툼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애플에 악재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애플은 공급망 다각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올해 애플은 제품 생산처를 베트남과 인도로 확장했고, 앞으로도 중국 외 지역에서 다양한 기기를 생산할 전망이다. 물론 아이폰 생산량의 90%를 담당하는 중국을 당장 벗어나긴 어렵겠지만, 애플이 올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근엔 반애플 전선이 강화되는 추세다. 에픽스토어, 스포티파이, 매치그룹, 메타 등 애플에 불만을 품은 거대 기업들이 애플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다. 이들은 애플의 앱스토어 수수료, 외부 결제 불허, 앱추적투명성정책(ATT)로 인해 애플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애플과 갈등을 겪는 이유는 각자 다르나, 주요 원인은 하나다. 애플의 폐쇄적인 정책, 즉 고집 때문이다.

(출처:Google)
애플의 최대 경쟁자 중 하나인 구글 역시 애플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RCS가 대표적이다. 구글은 애플이 아이메시지에 RCS를 지원하길 바란다. RCS는 세계이동통신협의회(GSMA) 표준으로, SMS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구글은 수년 전부터 이 같은 주장을 펼쳤는데, 올해는 아예 캠페인 차원으로 확대했다. 동시에 주기적으로 RCS가 대세인 점을 강조하면서, 애플을 비판했다.
하지만 애플이 다른 기업들의 요구를 받아들일진 미지수다. 유럽연합의 입법, 공급망 다각화는 애플의 성적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유럽연합은 인구 4억5000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시장으로, 애플에 중요한 지역이다. 공급망 다각화 역시 중국에서 코로나19 봉쇄로 생산 차질이 우려되자, 애플이 반강제적으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경쟁사는 애플이 독점적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애플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2022년은 애플에 변화를 요구했고, 애플도 어느 정도 수용 의지를 내비쳤다. 물론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 건 아니나, 콧대 높은 애플의 고집이 꺾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아직 애플의 폐쇄적인 생태계는 여전하다. 2022년 시작된 변화의 움직임이 애플을 어디까지 움직일지, 아니면 애플이 독자 생태계를 유지할 또다른 우회로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윤정환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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