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이 전반적으로 흔들리면서 업계 1위 엔비디아(NVIDIA)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 2분기 ‘독립형(외장용) GPU’와 중앙처리장치(CPU)에 내장된 ‘통합형 GPU’의 수요 모두 크게 감소했다.
존 페디 리서치(Jon Peddie Research)의 조사에 따르면 올 2분기 그래픽 카드 전체 출하량은 전 분기 대비 14.9% 감소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소비자들의 지갑 사정이 넉넉지 않으면서 스마트폰, PC 등 주요 전자 제품 소비가 줄어든 탓이 컸다. 게다가 코로나19 상황으로 장기화하던 재택근무가 다시 사무실 근무로 전환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엔비디아는 GPU를 가장 먼저 개발한 독립형 GPU 설계 기업이다. 그만큼 오랜기간 소비자들의 신뢰를 받고 있으며, 독립형 GPU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할 만큼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GPU 시장 전반이 위축되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엔비디아로 나타났다.
AMD의 GPU 출하량은 전 분기 대비 7.6%, 인텔은 9.8% 감소했다. 그런데, 엔비디아는 무려 25.7% 감소했다. 인텔과 AMD는 모두 중앙처리장치(CPU) 설계 기업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중앙처리장치(CPU)에 내장된 통합형 GPU 판매로 수익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었다. 독립형 GPU 한 우물만 팠던 엔비디아는 상황이 달랐던 것. 여기에 최근 오랜 파트너가 결별을 선언하면서 악재가 겹치고 있다.
‘22년이나 함께했는데’…EVGA, 엔비디아와 결별 선언
지난 16일(현지 시간)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 제조·판매 업체인 에브가(EVGA)는 자사 포럼 게시물을 통해 공식적으로 엔비디아와의 관계를 종료한다고 밝혔다. 파트너십 종료로 에브가는 엔비디아의 RTX 4000 시리즈 GPU를 제조하지 않을 예정이다. 에브가가 제조한 그래픽 카드는 북미 지역 판매 1위를 차지할 만큼, 게이머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꽤 높았다.
국내에서도 에브가가 제조하는 엔비디아 GPU는 ‘명품 GPU’로 입소문 날 정도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이 강점이었다. 에브가는 지난 2000년 엔비디아 지포스 MX 440을 위한 최초의 고효율 냉각기를 개발하면서 유명해진 회사다. 그만큼 GPU에 중요한 냉각 성능도 우수하다고 평가받았다. 수리나 교체 등 서비스도 타 업체보다 친절하다고 입소문이 나 소비자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다.
이들은 지난 2000년대 초반 게이머를 겨냥한 그래픽 카드 제조 업체로 시장에 전면 진출했다. 그리고 지난 22년 동안 엔비디아의 최대 파트너로 동행해왔다. 해외 IT 리뷰 유튜브 채널 게이머스 넥서스(Gamers Nexus)에 따르면 에브가의 매출 80%는 모두 엔비디아의 지포스(Geforce) GPU 판매로 나온다. 그렇기에 에브가도 회사의 재정을 생각했을 때, 파트너십 종료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 그렇다면 도대체 에브가는 왜 엔비디아와의 20여년 간의 동행을 끝내기로 결정했을까.
‘GPU 가격은 올랐는데 남는 것은 없어’…에브가 CEO의 불만
앤드류 한(Andrew Han) 에브가 최고경영자(CEO)는 게이머스 넥서스에 가격 정보와 신제품에 대한 엔비디아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을 비판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브가가 원했던 진정한 파트너십 관계는 무너졌고, 엔비디아가 제대로 된 대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관계는 기업 고객사와 판매 계약자의 관계에 가까웠다. 시장조사업체 존페디리서치는 엔비디아가 협의도 없이 제품 가격을 인상하거나, 이벤트와 신제품 출시 행사에 에브가의 제품을 등장시키지 않는 등 다양한 원인이 불만에 작용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 7일 엔비디아는 미국 전자제품과 컴퓨터 관련 제품 판매 사이트 ‘베스트 바이(Best Buy)’에서 1399.99달러에 판매되던 엔비디아 RTX 3090 Ti를 1099.99달러에 할인 판매하기 시작했다. 엔비디아가 사전 고지 없이 에브가와 기타 공급 업체의 제품 판매 가격을 낮춘 것이다. 공급 업체는 엔비디아의 요구에 맞추고자 낮은 비용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최근 GPU 제품 제조와 마케팅 비용이 크게 올랐다는 점이다. 에브가를 포함해 많은 업체가 게이머에게 고품질 GPU 공급 업체가 되고자 패키징에 더 많은 것을 넣고 있다. 자연스럽게 경쟁은 더 심화됐다. 게다가 최신 고급 그래픽 카드는 몇 년 전의 카드보다 훨씬 더 높은 전력 효율, 냉각, PCI-E 요구 사항을 가지고 있어 제조 비용이 더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GPU 가격은 오르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제품 마진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당연히 제조 업체인 에브가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파운더스 에디션도 문제’…경쟁 부추겨 공급 업체 제품 가격 낮추기도
엔비디아와 AMD 등 회사는 GPU 칩과 인쇄 회로 기판(PCB), 방열판과 냉각기, 외형까지 직접 제조하는 표준 그래픽 카드를 출시하는데 이를 ‘레퍼런스 카드’라고 한다. 레퍼런스 카드는 GPU 설계 회사의 표준 디자인을 충분히 준수해 안정적인 성능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에 에브가와 같은 제조·판매 업체에서 내놓는 제품은 레퍼런스 모델이 아닌 ‘비(非)레퍼런스 카드’라고 부른다.
엔비디아에서는 레퍼런스 카드를 ‘파운더스 에디션(Founders Edition)’이라고 부른다. IT 매체 톰스하드웨어(Tom’s Hardware)는 파운더스 에디션이 에브가에 지나친 부담을 줬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파운더스 에디션이 에브가와 기타 공급업체가 제공하는 카드 가격을 낮추고 가격 경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에브가에 판매 손실이나 이윤 감소를 더욱 심화할 수 있다. 안 그래도 계속된 마진 감소세에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하락한 상황인데, 가격을 낮춰야 하니 회사의 이중 고통이 계속된 셈이다.
두 회사의 어긋나버린 우정…인텔, AMD와 손잡을 가능성은
존페디리서치에 따르면 에브가의 엔비디아 GPU는 북미 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한다. 그렇기에 이 지역에선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그러나 IT 매체 아르스테크니카(Ars Technica)는 엔비디아가 크게 당황할 필요가 없다고 분석했다. 엔비디아는 에브가 이외에도 다른 파트너들이 이미 많다. 제품은 누가 제조했는지와 상관없이 비슷한 성능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에브가와 엔비디아의 파트너십이 종료되면서 회사가 AMD나 인텔 등 경쟁사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에브가는 당분간 GPU 시장으로 돌아갈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우선 회사는 올해 말까지 남아 있는 엔비디아 지포스 GPU 제품을 판매하고 지원되는 카드의 수리와 교체 서비스를 이행할 예정이다. 엔비디아는 대변인을 통해 에브가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며 간략한 입장을 밝혔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이수현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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