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시동생 집을 찾은 조던 벨라마이어(Jordan Belamire)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가상현실(VR) 헤드셋 HTC 바이브(Vive)에서 실행되는 ‘퀴VR(QuiVR)’이라는 게임을 그때 처음 접했다. 활을 이용해 좀비를 잡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꼈고 곧 깊이 빠져들게 됐다. 다른 게이머들과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 모드에 접속하게 됐다. 그리고 곧 문제가 발생했다. 벨라마이어는 ‘BigBro442’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게이머가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와 공중에 둥둥 떠 다니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 부위를 만지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렸다.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피하기도 했지만 그는 계속 따라와 비슷한 행동을 반복했다. 이후 더 대담한 행동까지 감행하면서 벨라마이어도 더는 게임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남편과 시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나중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조던 벨라마이어는 과거 성추행 경험을 털어놓으며 그때와 VR에서의 불쾌했던 경험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2016년 10월 21일, 조던은 일주일 전에 VR에서 경험한 내용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그의 글은 곧 널리 공유됐고 세간 관심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가상현실 안에서도 성폭력을 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일부는 성폭력이라는 해석은 과하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조던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QuiVR
하지만 수십 년에 걸친 연구에 따르면 VR은 현실 속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자들은 VR이 우리의 감각을 속이도록 설계됐다고 말한다. 우리의 두뇌는 가상의 신체도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게 하며 나아가 VR 속에서 위협이 되는 상황이 실제 위험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줬다.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가상 환경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멜 슬레이터(Mel Slater)는 인간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반사된 형체를 자신으로 인식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VR 실험 참가자가 적어도 두뇌에서는 아바타를 자신의 몸으로 인식한다고 설명했다. 슬레이터는 아바타가 비현실적이고 실제 몸과는 차이가 있더라도 상관없다고 덧붙였다.
스페인 카탈로니아 폴리테크닉 대학교에서 VR 내 지각을 연구하는 소피아 사인펠드(Sofia Seinfeld)는 가상 신체가 자신의 신체와 함께 움직이거나 뇌가 기대하는 것과 일치하면 가상 신체를 실제와 같게 느낀다고 말했다. 1998년 학술지 네이처에 처음 보고돼 반향을 일으켰던 ‘고무손 착각 실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무손 착각 실험은 실제 손은 차단막으로 가리고 손과 비슷하게 제작한 고무손을 주시하게 한 뒤 두 곳에 동일한 자극을 주면 실제 손이 아닌 고무손에서 자극을 받고 있다는 착각을 느끼는지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시각 정보는 촉각 정보를 왜곡시켰고 참가자는 고무손이 자신이 손이라는 착각 현상을 경험했다.

퀴VR에서 그리는 아바타는 머리카락, 손, 활이 둥둥 떠다니는 상당히 기이한 형태다 (출처:QuiVR)
조던 벨라마이어가 비록 신체 일부분이 둥둥 떠다니는 비현실적인 아바타였는데도 불구하고 불쾌한 감정이 들었던 근거는 위에서 소개한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VR 기술의 특성은 긍정적인 목적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했던 이들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는 일이 훨씬 쉬워졌다. 가정 폭력 가해자를 대상으로 피해자 입장에서 폭력을 경험하는 VR 체험을 하게했더니 이전에는 피해자의 표정에서 공포나 두려움을 잘 인식하지 못했으나 체험 이후에는 피해자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흑인 입장에서 경찰의 인종 차별적인 심문을 VR로 경험한 경찰관들은 흑인 용의자들에게 더 동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VR 신체를 실제와 동일하게 느끼는 것을 무시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 이들이다. 약 7년이 지난 조던 벨라마이어의 이야기가 아직도 회자되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메타의 메타버스 플랫폼 ‘호라이즌 월드(Horizon Worlds)’ 베타 테스트에 참가한 사용자는 다른 사용자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VR 시장은 그때보다 더 성장했고 아바타는 더 현실적인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메타에서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온라인 성희롱 문제를 인식하고 호라이즌 월드에서는 아바타 주위에 ‘개인 경계선(personal boundary)’이라는 공간을 부여한다고 발표했다. 아바타와 아바타가 아무리 가까워지더라도 최소 4피트(1.2m) 거리는 유지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후 아바타 간 거리두기 시행이 잘 정착되면 사용자가 개인 경계선의 범위를 수정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VR 기술이 발전해가면서 VR 플랫폼 안에서 벌어지는 온라인 괴롭힘 문제는 더욱더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깊이 고민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의 출현이다. 가상 공간에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도 새롭게 확립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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