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현실적인 가상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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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듯한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고자 선풍기를 돌리고 에어컨 온도를 낮춰 몸을 식힙니다. 전기비도 걱정이지만 목숨과도 같은 시원한 바람을 포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전력수요가 크게 늘어 예비전력에 비상이 걸렸다는 뉴스도 신경이 쓰입니다. 이러다가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죠. 어느 때보다 에너지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입니다. 매년 경험하는 일인 것을 감안하면 뚜렷한 해결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때면 언급되는 것이 ‘가상발전소(Virtual Power Plant, VPP)’입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비교적 최근 나온 개념입니다. 가상현실(VR), 가상자산, 가상인플루언서 등 ‘가상’ 바람이 불고 있는 요즘, 우리는 가상발전소의 이유 있는 등장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상발전소란?

가상발전소에는 주소가 없습니다. 물리적인 형태로 세워진 발전소가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발전소입니다.

가상발전소는 분산된 에너지를 서로 연결하고 하나의 발전소처럼 제어하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포인트는 ‘분산’입니다. 기존 대형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일괄 공급하고 관리하던 것과는 반대되는 개념이에요.

가정이나 기업에 설치된 에너지저장시스템(Energy Storage System, ESS)을 연결시킵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지 몰라도 가상 공간에서 이들은 한몸인 셈이죠. 가정용 태양광 발전 패널과 커다란 배터리를 내장한 전기차도 빠질 수 없습니다. 전기차의 경우 충전 장치를 통해 전력망과 연결되면 필요한 에너지만 남기고 잉여 에너지는 가상발전소에 제공됩니다. 이렇게 연결되면 모니터링을 통해 전력이 넉넉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전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작은 것도 모아놓으면 그 양은 어마어마해집니다. 가상발전소 안에서는 에너지 거래도 가능합니다.

여기에는 최첨단 기술이 모두 동원됩니다. 일단 전력망은 클라우드 기반 소프트웨어로 통합됩니다. 남는 전력에 대한 정보는 5G 통신망을 타고 전력 관리 센터로 전달됩니다. 센터에서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전력 소비 정보를 분석합니다.

(출처:Andrew Brumagen)

가상발전소가 등장해야 하는 이유

국내 초기 전력 산업은 중앙 집중형으로 발전했습니다. 석탄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은 여러 소비처에 전송됐습니다. 발전소가 멈추면 정상적인 전력 공급은 어렵습니다. 중앙집중형 방식에 수반되는 대규모 송전 설비는 기피시설로 인식돼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도 불가피합니다. 또한, 먼 거리까지 전력을 전송하다 보면 전력 손실도 있습니다.

이러한 단방향 전력 공급에 문제를 느끼고 나타난 것이 차세대 전력망 ‘스마트그리드(Smart Grid)’입니다. 기존 전력망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한 시스템입니다. 전력공급자와 전기소비자는 양방향으로 실시간 정보를 교환하게 됩니다. 전력이 저렴한 시간에 전자제품을 가동시켜 전기 요금을 절약하고 전력 사용 현황도 파악할 수 있어 전력 공급이 원활하도록 조절합니다. 전체 전력 시스템 효율도 당연히 높아지겠죠. 신재생에너지도 활용됩니다. 하지만 신재생에너지가 가진 특성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탄소 배출량을 ‘0’로 만들겠다는 탄소중립은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과제가 됐고 이는 전 세계적인 움직임이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신재생에너지가 주목받게 됐죠. 그런데 신재생에너지는 불확실한 자원입니다. 태양광, 풍력, 수력 등 필요한 순간 바로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생산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태양 빛이 충분하지 않다거나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면 전력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불확실한 발전량은 효율적인 전력 관리에 큰 장애가 됩니다. 전력을 거래하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어렵습니다. 가상발전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냅니다.

가상발전소가 등장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전력을 확보하려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발전소를 늘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발전소를 세우는 비용은 적지 않고 세워진 후에도 발전 비용이 투입되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아껴야 한다는 것쯤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 마음이 모여 온 국민이 다 같이 힘을 합쳐 에너지 절약을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습니다. 다 내 맘 같지 않은 법이죠. 전체 전력소비에서 가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1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도 낮은 편에 속합니다. 일반 소비자가 아등바등해도 여러 산업이나 상업 분야에서 사용되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거나 다수의 참여를 유도하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에너지를 잘 활용해 필요한 곳에 배치하고 관리하는 일에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가상발전소는 이에 최적화된 시스템입니다. 석탄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에 의존하는 비중도 낮출 수 있습니다. 어렵게 추가 발전소를 세워야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누가 잘하나

가상발전소가 가능하다는 것은 오래전에 입증됐습니다. 2008년 독일 카셀대학교에서 태양광, 풍력 등 각종 발전 설비를 연결시켜 가상발전소 시스템을 구축해냈죠. 세계 최초 가상발전소도 2012년 독일에서 등장했습니다. 현재 1400개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가상발전소 시스템에 속해있다고 합니다.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 호주와 같이 대규모 부지를 활용할 수 있는 국가에서 태양광을 이용한 가상발전소 운영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자리 잡는 중이죠.

한국에서 가상발전소는 신재생에너지 확산과 함께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 생소한 개념입니다. 가상발전소가 쓰이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에너지 전환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정부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에너지 공급을 목표로 소규모 분산에너지 시스템을 활성화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고 성공사례를 만들어나갈 계획입니다.

기업에서도 가상발전소 구축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테슬라가 대표적입니다. 얼마는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태양광 패널인 솔라루프와 가정용 ESS 파워월을 이용해 테슬라 가상발전소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기록된 이상 고온 현상으로 에너지 수요가 증가했고 심각한 가뭄으로 수력발전량은 감소하면서 꺼내 든 계획입니다.

테슬라는 호주에서 더 큰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남호주 정부와 함께 2022년까지 최소 5만 가구에 5kW 태양광 패널과 13.5kWh급 테슬라 배터리, 스마트미터 시스템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프로젝트에는 총 8억 달러가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설치 비용은 무료입니다.

발전으로 얻은 수익 일부는 가정으로 돌아가 전기 요금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참여 가구들의 전력 사용 비용을 최대 30% 가량 낮출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남는 전력을 저장해뒀다가 정전과 같은 비상상황에 사용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결과적으로 전력망의 안정성을 높일 것으로 기대됩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발전소를 구축하는 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로열더치셀은 지난 2월 글로벌 가상발전소 운영사인 넥스트 크라프트베르케를 인수하면서 재생에너지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입했습니다. 넥스트 크라프트베르케는 신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가상발전소 운영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들은 해외 시장을 무대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SK E&S는 한국 중부발전과 함께 미국 가상발전소 시장을 공략 중입니다. 미국 가정용 태양광 시스템 1위 업체 선런(SunRun)과 합작사도 설립했습니다.

한화큐셀도 가상발전소 사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호주 에너지 소프트웨어 업체에 투자하고 일본 가상발전소 사업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20년 8월 인수한 미국 소프트웨어회사 그로윙에너지랩스의 에너지저장장치 관리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가상발전소 구축 사업도 준비 중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틀을 새롭게 정립하고 환경도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때보다 환경을 생각하는 의식이 높아졌고 신재생에너지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도 이뤄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담아낼 다음 기술이 나타날 때입니다. 가상발전소는 현실에 발을 내디딜 준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나유권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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