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 (22)책 한 권으로 4년 마실 물 정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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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생존을 위한 책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 해변에서 혼자 살아남는 법을 담은 것은 아니다. 책 내용은 간단하다. 어떻게 물을 깨끗하게 하는지, 쓰레기 등 인간이 배출한 오염 물질로부터 물을 지키는 방법 등이 적혀있다. 물 오염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책은 많다. 왜 적정기술에서 이 책을 주목해야 할까.

우선 ‘저자’부터 살펴보자. 사실 저자라고 부르긴 어렵다. 책 개발자가 더 어울릴 법한 명칭이다. 이 책은 미국 카네기 맬런 대학의 테레사 댄코비치 박사가 주도해 만들었다. 그는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수치에 주목했다. 6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한다는 통계였다.

정화시설이 확충되면서 깨끗한 식수에 대한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일부다. 양극화는 마시는 물도 차별한다. 아프리카 등 가난한 국가나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오염된 식수를 마신다. 쓰레기가 넘쳐나면서 환경이 파괴되고 이는 식수 오염을 가속화하고 있다. 유니세프가 2015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8억명 이상이 오염된 식수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한 통계는 시시각각 바뀌겠지만, 지구에서는 10명 중 1명 이상이 더러운 물을 마신다는 사실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한다는 건 인간 생존의 위협을 의미한다. 오염된 물에는 대장균 등 박테리아가 존재한다. 이러한 박테리아는 각종 질병을 야기한다. 대표적인 것이 설사병이다. 우리나라 사람이야 뛰어난 위생 시설과 의료 체계 덕분에 설사병이 목숨을 위험하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빈민국가에서는 사망과 직결돼 있다. 특히 어린이가 취약한데, 하루에 1000명 이상의 5세 미만 아이가 설사병으로 죽는다고 한다.

테레사 댄코비치 박사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을 타개할 기술을 고민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마실 수 있는 책(Drinkable Book, 이하 드링커블 북)’이다. 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을 끓여 먹거나 최근 정수기를 통해 오염 물질을 ‘거른다’. 드링커블 북은 정수 기술을 통해 깨끗한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책이다.

물론 책 내용이 정수 방법론에 집중하지 않았다. 책 그 자체가 정수기 역할을 담당한다. ‘정수 책’이라고 하면 명확하게 드링커블 책을 정의 내릴 수 있다.

책은 약 20 페이지로 구성돼 있다. 누런 종이 위에는 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물을 정수하는 이유와 방법이 적혀져 있다. 글자는 인체에 무해한 콩 기름으로 인쇄됐다. 친환경적이다. 테레사 댄코비치 박사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깨끗한 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글을 담았다고 한다. 교육적 목적이다.

교육적 목적은 드링커블 북의 핵심이 아니다. 책의 한 페이지는 두 장으로 나눌 수 있다. 뜯으면 사각형 종이다. 이 자체가 바로 오염된 물을 거르는 ‘필터’다. 드링커블 북은 정수 역할을 위한 재료 그 자체인 셈이다.

오염된 물에 있는 이물질은 이 종이 필터로 거를 수 있다. 하지만 종이 자체는 살균 효과가 없다. 오염 수 내 박테리아를 억제하지 못한다. 테레사 댄코비치 박사는 이 종이에 은 나노 입자를 코팅했다.

테레사 댄코비치 박사

은(銀)은 대표적인 살균 소재로 손꼽힌다. 드링커블 북에 코딩된 은 나노 입자에서 음 이온(Ag+)과 산소의 일종인 초과산화물이 생성되는데, 이를 통해 박테리아 세포벽과 세포막을 손상시킨다. 음 이온과 은 나노 입자 자체가 세포 내에 침투해 박테리아를 죽인다.

드링커블 북 페이지(필터)에 물이 고여 정수되는 과정에서 은 나노 입자가 살균하니 이물질 제거와 박테리아 제거가 동시에 이뤄진다. 대장균 군집 형성 단위는 보통 CFU를 사용하는데, 테레사 댄코비치 박사의 실험에 따르면 초기 100ml 당 20만 CFU였던 오염수를 드링커블 북 필터에 거르고 나니 10CFU로 떨어졌다.

테레사 댄코비치 박사와 협력해 드링커블 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비영리단체 ‘워터이즈라이프(WATERisLIFE)’도 가나와 방글라데시에서 있는 오염된 수원 25곳의 물로 드링커블 북을 실험했다. 그 결과 대장균과 장티푸스 균 99.9%를 없앨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책은 20여페이지로 구성됐다고 언급했다. 각 페이지는 2장으로 나눌 수 있으니 총 40장이다. 한 페이지로 오염 수를 정수할 때 약 30일 정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즉 1200일(40장X30일)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다. 3~4년 동안 드링커블 북을 통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의미다. 책 한 권 가격은 약 10달러로 책정됐다.

책은 3차원(3D) 프린터로 찍어낸 보관함에 담겨 배송되는 것이 최초 구상이다. 이 보관함도 유용하다. 드링커블 북에서 뜯어낸 필터를 그물 모양의 보관함 아랫부분에 끼우면 그 자체가 정수기 통이 된다. 정수기와 필터가 함께 제공되는 것이다.

드링커블 북의 효과를 입증한 테레사 댄코비치 박사와 워터이즈라이프는 2014년 스타트업 ‘페이지 드링킹 페이퍼(pAge Drinking Paper)’를 설립했다. 프로젝트 확산을 위한 기반을 닦으려는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드링커블 북은 현지화에 적합한 필터 고정 장치(정수기 통) 등 다양한 디자인 의견을 수렴했다.

드링커블 북과 함께 제공되는 정수기 통 외 장치를 통해서도 필터를 적용, 정수기로 활용할 수 있다. 가령 커피 드롭기 같은 장치에도 필터를 끼워 사용할 수 있다. 체 형태의 바구니를 개량해 필터 고정할 수 있다면, 정수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추가적인 연구와 현지 테스트, 사업화를 위해 페이지 드링킹 페이퍼는 인디고고에 크라우드 펀딩을 추진했다. 3만달러를 모금하는 것이 목표였다.

결론은 어떻게 됐을까. 드링커블 북 프로젝트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당시 모금은 1만달러 수준에 그쳤고 인디고고 모금 활동은 종료됐다. 현재는 워터이즈라이프가 기부 방식으로 드링커블 북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본격적인 사업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개선해야 할 부분도 지적됐다. 호주 뉴사우스웨일 대학의 스튜어트 칸 박사는 “사람들이 박테리아가 충분히 제거되고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라며 “소독이 충분히 됐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확인할 수 있다면 (드링커블 북) 개념은 실질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깨끗한 물이 부족한 지역 사회에 안전한 식수를 제공하려는 모든 노력은 박수를 받아야 한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권동준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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