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 (19)이것은 놀이인가 노동 착취인가 ‘플레이 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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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다. 그 아이디어는 그대로 제품이 되지 않는다. 아이디어 현실화 과정에는 수많은 요소가 개입된다. 가령 시장 환경이라든지, 구매자(이용자)의 수요 혹은 요구, 가격, 경쟁 제품 등 엄청난 변수가 맞물려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탈바꿈한다. 만약 변수를 놓치거나 변수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혁신 아이디어도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

지금 소개하는 적정 기술이 대표적이다. 적정 기술 아이디어는 획기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실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적정 기술이지만 적정하지 못했다고 지적받는 ‘플레이 펌프’가 그 비련의 주인공이다.

플레이 펌프가 세상에 소개된 건 1989년이다. 시추 엔지니어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로니 스투이버가 개발했다. 그는 한 농업 박람회에서 플레이 펌프를 선보였다. 박람회에서 플레이 펌프를 처음 본 농업 경영가인 트레버 필드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장치만 있으면 아이들이 놀면서 마을의 급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여기서 플레이 펌프 구조와 원리를 짚고 넘어가자. 우리에겐 ‘뺑뺑이’라는 별칭으로 친숙한 놀이기구가 있다. 커다란 철제 원판 위에 파이프 등으로 손잡이(안전장치)를 장착한 놀이기구다. 원판 가운데 축을 땅에 고정시켜 좌우로 돌리면 된다. 아이들이 직접 뺑뺑이를 돌리면서 그 위에 올라타 놀 수 있다. 원판 없이 파이프로만 이뤄진 것도 있다.

플레이 펌프는 이 놀이기구를 돌리면서 발생하는 동력을 이용, 지하수 물을 끌어올리는 적정 기술 장치다. 회전이라는 기계적 에너지를 통해 펌프 내부의 압력을 낮춘다. 그러면 지하수가 펌프 쪽으로 끌어 당겨진다. 흡입 과정이다. 다시 회전력이 물을 밀어 압력을 높이면서 아래에 있는 물을 위로 끌어올린다. 풍차 동력 펌프와도 비슷한 원리다.

아이들이 놀면서 플레이 펌프를 돌리고 지하수를 양수해 물탱크에 저장한다.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물탱크에 저장된 물을 활용할 수 있다.

단순히 물을 얻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물탱크는 높은 탑 위에 있는데, 상단 물탱크에 광고판을 설치할 수 있다. 지역 광고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된다. 지속적인 수익을 통해 적정 기술로 거듭날 수 있는 요소를 갖췄다.

트레버 필드는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지역에 플레이 펌프 2대를 설치했다. 1999년 플레이 펌프는 세계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넬슨 만델라가 플레이 펌프 설치 학교의 개교식에 참석하면서부터다. 다음 해 세계은행에서 플레이 펌프에 개발 시장상(Development Marketplace Award)을 수여했다. 2006년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행사에서 플레이 펌프를 설치하기 위한 후원금으로 1640만달러(약 195억원)이 약정되기도 했다.

플레이 펌프는 승승장구했다. 2008년까지 세계적으로 1000개의 플레이 펌프 시스템이 구축됐다. 트레버 필드는 여기에 힘입어 2010년까지 4000대 플레이 펌프를 설치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 PBS 방송국은 플레이 펌프에 대해 ‘문제가 있는 물’이라고 보도했다. PBS는 2005년 플레이 펌프를 보도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데 공헌한 매체다. PBS는 왜 플레이 펌프의 문제점을 지적했을까.

PBS는 모잠비크 사례를 들어, 수십 개의 플레이 펌프가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수많은 마을에서 이미 설치한 플레이 펌프를 철수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플레이 펌프는 손으로 물을 퍼올리는 ‘핸드 펌프’로 대체됐다고 덧붙였다. 플레이 펌프의 비효율성과 노동 착취 가능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가 됐다.

적정 기술의 핵심 중 하나가 운용이 쉬워야 한다. 그리고 유지 보수가 어려워서는 안 된다. 특히 유지 보수가 힘들면 적정 기술의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유지 보수에 비용이 많이 든다면 적정 기술의 기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실패한 적정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유지 관리가 되지 않은 플레이 펌프는 고철이 됐다. 2009년 플레이 펌프 인터내셔널은 아직까지 설치가 안 된 플레이 펌프 재고를 ‘피플 포 워터’에 보냈다. 기존 플레이 펌프의 유지 보수를 위해 새로운 플레이 펌프는 설치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유지 보수가 어려운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아이들이 플레이 펌프로 놀지 않는 것이다. 노는데 ‘힘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 적정 수준의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플레이 펌프를 돌려야 할 시간이 너무 길었다. 돌리는 것도 쉽지 않다.

핸드 펌프와 비교하면 플레이 펌프의 비효율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리터 물을 양수하는데, 핸드 펌프는 28초면 가능하다. 하지만 플레이 펌프는 3분7초가 걸린다. 즉 핸드 펌프 효율이 6배 높다는 뜻이다. 핸드 펌프 가격은 플레이 펌프의 4분의 1 수준이다.

물을 끌어올리는데 많은 힘이 들다 보니 ‘놀이’ 범주에서 벗어났다. 장시간 플레이 펌프만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점차 사라졌다. 물이 시급하게 필요할 때 플레이 펌프를 억지로라도 돌리는데, 여기서 놀이가 노동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플레이 펌프를 돌리는 아이를 보고 세상은 ‘아동 노동력 착취’라고 비판했다. 아이가 돌리지 않으면 이는 여성의 몫으로 돌아갔다.

일부 지역에서는 플레이 펌프를 지역 주민 상의 없이 설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원하지도 않은 기술이 도입돼 놀이와 노동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고장 난 플레이 펌프를 고칠 능력이 현지인에게는 부족했고, 사용 가능한 플레이 펌프는 힘이 들었다. 점차 이용 빈도가 줄어들었고 플레이 펌프는 애물단지가 됐다. 2010년 가을 플레이 펌프 프로젝트의 실패가 공식화됐다.

플레이 펌프 사례는 적정기술 분야에 크나큰 교훈을 남겼다. 적정 기술의 요소를 꼼꼼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쉽게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정 기술은 절대 공급자 시각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현지 주민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기술 공급을 결정해야 한다.

또 활용 측면에서도 적정 기술 요건을 충족하는지 면밀히 따져야 한다. 플레이 펌프 경우 핸드 펌프보다 양수하기 어렵다는 점을 미리 고려했다면, 아이의 놀이를 노동으로 변질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규모 후원 등의 지원금으로 플레이 펌프를 설치하다 보니 유지 보수도 놓쳤다. 아이들에게 ‘놀기’를 강요하는 플레이 펌프는 적정 기술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남았다. 적정 기술은 △현지화된 발전 △지속가능한 발전 △환경친화적 발전이라는 개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권동준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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