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투자자들에게 비트코인은 ‘심심한 코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다른 암호화폐들에 비해 변동성이 낮은 편인데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이미 안정세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술적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인상 때문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런 통념은 최근 몇 달 새 송두리째 뒤바뀌는 중이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비트코인 NFT(대체불가토큰)가 등장했다. 비트코인 가격은 그대로인데 네트워크 수수료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는 이상 현상도 나타났다. 한동안 고성이 오가지 않던 비트코인 커뮤니티에는 치열한 갑론을박이 부활했다.
요즘의 비트코인 네트워크는 가격과는 관계 없이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현상의 중심에는 지난해 12월 혜성처럼 나타나 새로운 유행을 만들기 시작한 오디널스 프로토콜(Ordinals Protocol)이 서 있다.
비트코인 NFT 일종인 ‘탭루트 위자드’ 이미지. (출처: 코인데스크)
오디널스 프로토콜, ‘비트코인 NFT 만드는 기술’
비트코인의 가장 작은 단위를 사토시(Satosho)라고 부른다. 1개의 비트코인은 1억개의 사토시로 이뤄져 있고, 각각의 사토시에는 순서대로 번호가 자동으로 매겨지는데 이 번호를 오디널스 번호(ordinal number)라고 한다.
오디널스 프로토콜은 이 각각의 사토시마다 이미지, 텍스트, 프로그램, 비디오 등의 데이터를 첨부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1개의 비트코인 블록 당 최대 4메가바이트까지 데이터 첨부가 가능하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이라는 기록 공간에 조작할 수 없는 형태로 거래 정보를 담는 전자 화폐 시스템이다. 그래서 사토시에 첨부된 데이터는 조작이 불가능하다. 아울러 이 데이터는 각각의 사토시와 연동되어 있으므로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통해 화폐를 주고 받듯이 거래가 가능하다.
이런 특징들은 지난 2021년 이더리움 플랫폼을 통해 전체 암호화폐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대체불가토큰(NFT)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오디널스 프로토콜은 일종의 ‘비트코인 NFT’인 셈이다.
암호화폐 업계에서 NFT는 거래 플랫폼에 폭발적인 성장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의 이미지가 강하다. 지난 2020년 이더리움 중심으로 NFT 열풍이 불면서 그해 말 9400만달러 정도였던 글로벌 NFT 거래 대금이 1년만에 248억달러까지 약 263배로 불어난 바 있다. 이 과정을 이끌었던 이더리움, 솔라나, 테라 등의 블록체인 플랫폼 가치는 수십 배 이상 증가했다.
통상 어떤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NFT 거래가 가능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해당 플랫폼을 이용하게 되기 때문에 전체 플랫폼 가치가 커지게 된다. 지금까지 없었던 비트코인 NFT가 출현할 경우, 비트코인 플랫폼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5월 22일 현재 비트코인의 시가총액은 이더리움의 2.4 배 수준이다.
갑자기 등장한 BRC-20에 비트코인 수수료 15배 오르기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비트코인 플랫폼 위에 다른 토큰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들이 잇따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올해 3월 출시되어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BRC-20’이다.
BRC-20 토큰을 탐색할 수 있는 https://brc-20.io/
BRC-20은 오디널스 프로토콜을 활용해 비트코인 위에 또 다른 토큰(FT)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종의 토큰 생성 표준이다. 이더리움 블록체인 위에서 이 역할을 하는 가장 대중적인 토큰 표준이 ERC-20인데, 거기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사실 BRC-20에서 사용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현재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로 P2P 방식의 토큰 전송이 가능한 상태다. 정해진 코드를 이용해 자동 계약(스마트컨트랙트)을 만들 수 있는 ERC-20과는 달리, 스마트컨트랙트 기능도 거의 사용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아무튼 BRC-20을 매개로 엄청난 거래량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다. 암호화폐 데이터 분석 기업 크립토퀀트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초 비트코인 일일 온체인 트랜잭션 수는 연초 대비 2.7배 늘어난 68만2000건을 기록했다. 22일 현재 BRC-20 토큰들의 시가총액은 4억4258만달러(5832억원)에 달한다.
이런 현상은 비트코인 네트워크에 이전에는 없었던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트랜잭션 수가 급증하면서 채굴 수수료도 급증했다. 크립토퀀트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7일의 경우 비트코인 채굴자가 가져가는 총 수익의 32%가 오로지 비트코인 네트워크 수수료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비트코인 역사상 2번째로 높은 수치다.
듄애널리틱스의 오디널스 관련 비트코인 수수료 분석. (출처: 듄애널리틱스)
이 수수료 수입 중 약 30% 정도가 BRC-20 등 오디널스 관련 거래로 발생한 것이다. 암호화폐 분석 사이트인 듄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지난 8일 발생한 비트코인 네트워크 수수료 899BTC 중 257BTC가 오디널스 프로토콜에서 기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네트워크 사용량이 증가하자 일반 사용자들이 비트코인을 전송하면서 부담하는 트랜잭션 수수료도 덩달아 증가했다. 세계 최대 거래소인 바이낸스는 지난 7일 오전 거래소에서 나가는 비트코인 출금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해프닝도 빚었다. 갑자기 비트코인 트랜잭션 수수료가 평소의 15배 정도 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용자들이 부담하는 비트코인 트랜잭션 수수료도 15배 정도 올랐다. (출처: Blockchair)
“오디널스 못 쓰게 해야” VS “오디널스가 비트코인의 미래”
오디널스 프로토콜과 BRC-20의 인기에 대해 비트코인 커뮤니티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선 일각에서는 ‘근본론’을 내세운다. 비트코인은 원래 P2P 탈중앙화 대안 금융 시스템으로 설계된 프로토콜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지금까지는 설계 취지에 맞게 쓰여왔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스위프트(SWIFT) 망이 아닌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중립적인 금융망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시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한 마디로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NFT 거래 같은 용도로 사용하면서 불필요하게 네트워크 혼잡을 일으켜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일부 비트코인 개발자들은 이런 문제를 들어 오디널스 등을 쓸 수 없도록 비트코인 기능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트코인 특성상 일정 수준 이상의 트랜잭션 수수료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번에 오디널스와 BRC-20 사태가 불거지면서 그 희망을 봤다는 것이다.
비트코인 네트워크는 비트코인을 채굴하는 채굴자에 의해 유지된다. 채굴자는 채굴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정해진 양의 ‘블록 보상’과 ‘수수료 보상’을 받는데, 이 중 블록 보상은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절반씩 감소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현재는 비트코인 블록 1개를 채굴할 때마다 6.25개의 비트코인을 블록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 한화로 약 2억 2000만원 정도다. 문제는 이 정도 보상으로는 채굴자의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데 있다. 설상가상으로 내년 5월쯤부터는 블록 보상이 3.125개로 줄어든다. 만약 줄어드는 블록 보상을 수수료 보상으로 만회할 수 있을 만큼 비트코인 거래가 충분히 많이 나오지 않는다면 비트코인 네트워크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지난 9일을 정점으로 오디널스와 BRC-20의 열기는 한풀 꺾인 상태다. 그러나 ‘비트코인 NFT’가 자아낼 파급 효과는 이제 막 시작한 수준에 가까워 보인다. 비트코인 근본론을 펼치는 이들과 오디널스를 선호하는 이들이 끝내 의견을 좁히지 못할 경우, 하드포크를 통해 ‘또 다른 비트코인’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다소 기술적인 이 이슈에 일반 투자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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