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로이터)
지난해 6월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50년 가까이 여성들의 낙태권을 보호하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은 건데요. 이에 미국 전역이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판결이 뒤집힌 후 미국 여성들이 거리 위로 나와 낙태권 폐지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이기도 했어요.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시작은 지난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미국 텍사스에 살던 한 여성이 성폭행당해 임신했는데요. 피해 여성은 낙태하고 싶었지만, 당시 텍사스 주법은 낙태를 금지하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어요. 결국 이 여성은 제인 로(Jane Roe)라는 가명으로 텍사스 주법이 미국 헌법에 위배된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 앞에서 낙태권을 요구하는 이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로이터)
이후 1973년 미국 연방대법관들은 텍사스 주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어요. 낙태권이 미국 헌법에 의해 ‘사생활의 권리’에 속한다는 거죠. 다시 말해, 임신부의 낙태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시된다는 거예요. 해당 판결은 이후 원고인 제인 로와 피고 측 검사장이었던 헨리 웨이드(Henry Wade)의 이름을 따서 ‘로 대 웨이드’ 판결로 불리게 됐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덕분에 미국 여성들은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미 연방대법원이 지난해 6월, 해당 판결을 돌연 폐기해버린 겁니다. 결정권이 각 주로 넘어가게 된 건데요. 이후 보수 성향의 주에서는 임신 중절을 금지하는 법이 잇따라 발효됐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후 부상한 데이터 프라이버시 문제
생리 주기 추적 앱 ‘Flo’ (출처: 구글 플레이스토어)
판결이 폐기된 후, 사생활 보호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사용하는 생리 주기 추적 앱이 논쟁이 됐는데요. 여성들이 앱에 생리 주기를 비롯해 각종 민감한 데이터를 기록하는데, 이게 낙태가 불법인 지역의 여성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국가가 낙태한 사람을 기소할 때 생리 주기 추적 앱 데이터를 사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여성들이 사용하는 생리 주기 추적 앱이 낙태한 사람을 찾는 데 무기가 되는 셈이죠.
국내에서 많이 사용되는 여성 건강 앱 ‘핑크 다이어리’ (출처: NHN)
사생활 보호 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코리 닥터로우(Cory Doctorow)는 이러한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가 단순히 앱을 삭제했을 때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생리 주기 추적 앱의 데이터 유출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이런 앱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고도 말했죠.
이후 데이터 프라이버시에 대한 인식이 재고되면서 관련 논의가 한동안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일부 앱에서는 데이터 보호에 더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이를 촉발한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도 벌써 8개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현재까지 여성 건강 앱에서의 데이터 프라이버시는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일부 앱에서는 사용자 데이터 익명화…활발한 논의 후 개선된 모습
(출처: 노컷뉴스)
많은 여성 건강 앱에서 사용자의 개인 정보 보호를 한층 더 강화했습니다. 글로우(Glow) 사의 생리 주기 추적 앱 ‘이브(Eve)’는 데이터를 서버 대신 로컬에 저장하는 방안을 도입했습니다. 또한 글로우 측은 모든 데이터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직원에게 개인 정보 보호와 보안 교육을 하고 있다고 밝혔어요.
생리 주기 추적 앱 ‘플로우(Flo)’는 데이터를 익명으로 저장하고, 새로운 개인 정보 보호 책임자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플로우 측은 IT 매체 엔가젯(Engadjet)에 IP 주소를 완전히 사용하지 않는 추가 기능을 사용해 향후 익명성을 더욱 확장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생리 주기 추적 앱 ‘클루’ (출처: thismonth)
또 다른 유사한 앱인 ‘클루(Clue)’ 역시 더 유럽 연합(EU)의 더 엄격한 개인 정보 보호 법을 준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캐리 월터(Carrie Walter) 클루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엔가젯에 “사람들의 건강 데이터를 정부 당국이 사용하도록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방심하기엔 이르다…관련 법 없기 때문에 아직 더 주의해야
하지만 다수의 업계 전문가는 아직 방심할 때는 아니라고 경고했습니다. 실제로 개인 정보 보호와 보안 전문가 젠 칼트라이더(Jen Caltrider)의 연구에 따르면 여전히 개인 정보 보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건강 앱이 많았습니다.
지난해 8월, 그는 25개의 여성 건강 앱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어요. 분석 결과 25개 중 18개가 개인 정보 보호 기준에 못 미쳤어요. 연구 발표가 판결 폐기 후 데이터 프라이버시와 관련해 많은 논의가 오갔던 시기인 걸 감안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데이터 프라이버시에 대한 수많은 논쟁에도 여전히 민감한 데이터를 보호할 업계 표준이나 연방 법률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전문가들은 사용자들이 생리 주기 추적 앱과 같은 건강 앱을 사용할 때 여전히 주의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어요.
사용자들은 이용 약관을 주의 깊게 읽는 것이 필요해요. 또한 앱 기능을 쓰는 데 필요하지 않은 데이터 공유 옵션은 끄는 것이 좋습니다. 이외에도 전문가들은 메시지가 삭제되는 채팅 앱으로 생리 주기 등 민감한 정보를 얘기하고, 신뢰할 수 있는 VPN에 연결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누구나 기록을 남기면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는 디지털 환경 속 데이터 프라이버시와 관련해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덕분에 여성 건강 앱 데이터 환경이 긍정적으로 개선됐지만, 아직 부족한 만큼 주의해서 사용하는 게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사용자의 개인 정보를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안이 도입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싶네요.
테크플러스 에디터 이수현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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